갈릴리 하구로부터 남쪽으로 약 24 Km 지점에 위치한 벧샨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에서의 전투에서 죽은 사울 왕의 목없는 시체가 '벧샨 성벽에 못박힌' 도시로 유명하다 (삼상 31:7 ~ 13). 다윗의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노래 (삼하 1:17 ~ 27) 또한 유명하다.
본래 이 도시는 이즈르엘 골짜기와 요르단 골짜기의 접경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BC 19세기 이집트의 자료에 언급될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지배와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BC 13세기 이스라엘의 므낫세 지파에게 영토로 분배되었으나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의 이 도시를 정복하지 못하였다. (삿 1:27).
BC 10세기 솔로몬이 정복한 이후 (왕상 4:12) BC 3세기 헬라 사람들이 정복하여 스키도폴리스 (Scythopolis) 라 개칭되기까지 이스라엘이 다스리고 있었다. 안디오쿠스 4세 (BC 175 ~ 164) 가 이 도시의 지배자로 등장한 후 한때 이 도시는 닛사 (Nysa)라 불리워졌으며, 헤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John Hyrcanus)는 BC 107년 이곳에 사는 헬라인들을 유대인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AD 66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되기도 하였다.
4세기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벧샨은 대규모의 도시로 발전하여 Palestina Secunda 의 수도로 자리를 잡게 된다. 현재 진행중인 고고학적 발굴은 고대 도시인 텔 벧샨 (Tel Bet Shean) 과 잘 조화를 이룬 대규모의 로마-비잔틴 도시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극장과 목욕탕, 거리와 화려한 모자이크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시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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